01. 대통령을 향한 경쟁자들/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4)(선거의 역사를 바꾼 첫 TV대결 TV토론)토론회 당일까지 두 사람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케네디는 토론회 전날에 시카고에 도착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보좌관에게 첫번째 질문을 던졌다. “여자는 확보했던 걸까?”그와 수행원들은 파머 하우스 호텔 꼭대기 2층을 다 차지하는,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옥상에서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일광욕을 즐겼다. 그는 실내 가운을 입고 침대에 눕고 페기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8×3㎝의 카드를 가지고 토론회 준비를 했다. 한 친구에 따르면 토론회가 시작되기 1시간 반 전에 그는 호텔의 다른 방에 있는 창녀를 찾아 15분 후에 싱글벙글 웃고 나타났다.그리고 바로 텔레비전 스튜디오로 향했다. 한편, 닉슨은 11개 주를 도는 지방 유세에서 지치고 무릎에 통증을 느꼈고 전날 밤에 시카고에 도착한 다음날 그는 사람들과 접촉을 거부하고 정책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토론 준비에 6시간 걸렸다. 그가 마침내 토론장에 도착했을 때 차에서 나오다가 다시 무릎을 부딪쳐서 큰 고통을 맛 봤다. 케네디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프로 복서처럼 “악수를 나눴다. ” 어떻습니까”과 케네디는 무심코 물고”클리블랜드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라고 닉슨은 대답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닉슨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가더니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때 닉슨이 무서워하기 시작한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화장을 하고 싶냐고 묻자 케네디는 거절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작가에 따르면”어쨌든 그는 선탠하게 남아서 마치 어린 아도니스(비너스에게 사랑 받은 그리스의 미소년)처럼 보였다. 아마 케네디가 화장을 거절했기 때문에 닉슨도 거절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닉슨은 그리스 미소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통증으로 창백하고, 항상 무성한 턱수염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닉슨은 레이지 쉐이브이라는 화장품을 발랐는데, 얼굴을 더욱 창백했다.닉슨 자신을 더욱 위축시킨 것은 케네디가 그 방을 떠나는 방송 3분 전까지 기다리고 당당하게 텔레비전 무대로 걸어 들어온 점이었다. 600만명의 시청자 앞에서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 닉슨은 이미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이겼다고 생각할수록 그는 매우 훌륭한 정치관을 보였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보면 잘생기고 자신감에 찬 케네디와 창백한 땀을 흘리는 닉슨을 본시청자들은 닉슨이 진 것을 알고 있었다.닉슨의 부통령 후보 헨리·캐봇·로지는 나중에 “저 잡놈이 선거를 망쳤을 뿐이다”라고 불평했다.텔레비전 토론회는 선거의 판세를 결정했다. 토론을 시청한 사람 중 43%는 케네디가 이겼다고 답했고 29%는 비겼다고 답했고 23%는 닉슨이 이겼다는 반응을 보였다. 토론회 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케네디가 49:46으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이미지에서 진 닉슨/그들의 표정은 이렇게 완전히 달랐다)결국 닉슨은 패배했다. 박빙이지만 1960년 11월 모든 투표가 집계된 때 케네디는 119,450표 차로 승리했지만 이는 0.1%미만의 근소했다.닉슨은 화려한 케네디에게 불신감을 느끼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공화 당원에 승리했다.사실은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를 도난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케네디의 부통령 후보였던 링동·존슨의 고향 텍사스에서는 사망자가 투표하고 부정 투표권자 등록이 만연하고 1만 표 가량이 케네디를 위해서 조작됐다는 보고가 있었다.일리노이 주의 주요 주에서 보고는 훨씬 나쁜 것이었다. 거기에서 닉슨은 102군 가운데 93군을 차지했으나 인구가 가장 많은 쿡 카운티에서 패했다. 케네디가 쿡의 정치 지도자 리처드·데일리를 조종했기 때문이었다. 쿡에서의 패배는 일리노이에서 패배를 의미했다.케네디 진영은 닉슨이 재투표를 요구한다고 예측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선거가 끝난 뒤 토요일에 케네디는 닉슨에게 전화를 걸고 은밀히 만나자고 제안했다.(정치의 새로운 장을 연 TV토론회)두 사람은 만났으나 닉슨은 선거 결과에 아무런 언급도 없이 케네디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진을 찍어 이는 모든 사람에게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전해사진이었다.그 뒤”뉴욕·헤럴드·트리뷴”기자인 말조는 닉슨이 선거를 독살됐다는 일련의 기사를 썼다. 닉슨은 마리 조에게 전화를 걸고 국가적 결속을 위해서 기사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때 닉슨은 마지막까지 부통령 직을 열심히 수행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직을 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케네디는 1961년 1월, 닉슨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했다. 케네디가 암살되는 3년 전에 만났으나 그들이 다시 친구가 된 적이 없다. 선거 결과에 대해서, 그는 박빙의 승부에 놀랐다는.닉슨은 어땠을까? 그는 용감하게 국민적 단결을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선거가 도둑맞았다고 느꼈을 것이다.케네디와 재클린1972년 그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CIA 요원을 보내 민주당의 비밀을 훔치도록 했다. 그것은 그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사람들은 케네디 사후 10년이 지났음에도 일종의 복수를 갈망했다고 생각했다. 케네디와 닉슨의 이야기 딱02)오늘의 명언 환경이 자신의 성질에 적합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한층 탁월한 사람은 자신의 성질을 환경에 적합하게 한다.”-흄 “현명한 사람은 그가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만든다.”-베이컨 “자신에게 성의가 있다면 상대방에게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자신에게 거짓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성의가 있을 리 없다.”-토마스만 참고 자료/<네이버 검색> <라이벌의 역사> 조지프 커민스